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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껄렁한 이야기/부귀영화

색, 계 (戒│色)

 원래 "마이클 클레이튼"을 보러 갔다. 아니, 봤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의 재미를 얻지 못했다.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아침 무료신문의 개봉영화 리뷰를 통해 걸었던 기대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것이 기사를 가장한 전면광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스럽고 부족한 기억을 되뇌이는데 영화 러닝타임을 소비하게 했다. 그러다 밀려오는 잠을 밀어내느라 다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실제 졸았는지를 가늠하지도 못할 만큼 몽롱한 시간이 계속 되면서, 그리고 어느 순간 영화의 줄거리를 좇는데 거의 실패하면서 줄곧 드는 생각은 '영화 끝나고 뭐하지'하는 것이었다. 매표 대기소에 있는 엑스박스 NBA 2K7를 다시 해볼까, 배도 슬슬 고픈데 뭐 좀 먹을까 등등...
  그러다가 오랜만에 나온 극장나들이가 아쉬워서 다른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남들이 재미있게 봤다던 "세븐데이즈"를 보고자 했는데 항상 그럴 때면 그렇듯이 시간이 맞지 않아서 나름 선전하고 있다던 "색계"를 보기로 했다. 30여분의 대기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물론 한국영화를 보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양조위가 나온다는 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그래, 이안 감독의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도 좋았으니까. 비록 처음 이안 감독의 작품을 본 것은 "센스, 센서빌리티"로, 계속 잠만 잔 기억으로 가득할 뿐, 당시 영화제목은 해외 작품의 경우 원어 그대로 사용할 경우 두 단어를 초과해선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센스 앤 센서빌리티"란 원제목에서 "앤드 And"를 콤마로 대체했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기억만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비슷한 시기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투 다이 포(To Die For)"도 그런 이유로 "2 다이 4"라는 해괴한 제목을 달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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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순서 그대로 왼쪽부터 읽으면 "계│색"이다. 계색... 하하핫.

  일제강점기의 즁국을 벗어나 홍콩의 링난대학(? 대충 그런 이름)으로 간 왕치아즈(탕웨이)는 연극부의 광위민(왕리홍)에 혹해서 연극부에 가입하게 된다. 연극부는 중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연극을 기획하고, 왕치아즈는 연기를 통해 희열을 느끼게 된다. 연극을 통해 중국인들의 마음을 확인한 연극부는 친일파인 이 장군(양조위)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막 부인으로 위장한 왕치아즈는 이 장군의 부인과 친해지고 이 장군의 관심을 끄는데까진 성공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시간의 부족과 자금의 부족, 그리고 경험미숙으로 인한 아마추어리즘으로 인해 결단성 부족을 겪게 되고 결국 이 장군은 상하이로 발령받아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며 자신들의 정체를 알게 된 형님을 살해하는데 그친다.
  시간은 흘러 상하이에서 공부를 계속하던 왕치아즈는 광위민과 재회하게 되고, 조직적이고 프로페셔널한 항일단체에 가입한 광위민은 다시 왕치아즈에게 막 부인이 되어 이제는 장관이 된 이 장군의 암살작전에 동참해주기를 부탁한다. 왕치아즈는 색으로 이 장관을 유혹하고 암살 테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말의 경계심을 놓치 않는 이 장관은 차츰 경계를 풀며 왕치아즈의 색에 이끌린다.
 

 런닝타임은 꽤나 긴 편이지만 전혀 길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정도로 영화의 흡인력이 좋은 편이다. 양조위 역시 왜 그가 아시아의 대표배우인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다만 선인으로서의 양조위의 역에 익숙한 나로선 다소의 이질감이 들긴 했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에선 악역의 양조위의 행동이 최소한으로 그려져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왕치아즈는 처음 시작한 무대 위의 연기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런 연기를 실제 생활에서 연기를 펼치게 된다. 또한 처음 육체적 관계를 맺고 탐닉을 하게 된 이 장관에게서 치명적인(그녀가 맡은 임무에 반하는) 매력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왕치아즈가 왜 이 장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지, 아님 사랑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왜 그를 놓아주게 되는지가 나로선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무대 위에서 펼치던 연기를 인생 자체로의 연기를 펼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혼란인지, 육체적으로 나눈 교감이 발전한 것인지. 이 장관이 뱀처럼 자신을 파고들어 자신이 도리어 색에 포위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광위민과 나눈 대화에서 너무 늦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없는데, 내가 여자의 심리에 대해선 젬병이라 그런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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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는 유난히  거울과 유리가 자주 나오는데 어쩌면 상대를 탐닉하기 위한 또는 자신을 투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타인을 통해서겠지만 일차원적으로 자신을 보기 가장 쉬운 물건은 거울이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 거울 속 상대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또는 뒤에서 다른 생각을 품을 상대를 경계하기 위해 자신의 뒤를 볼 수 있는 훌륭한 소품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울을 선택한 것은 더할 나위없이 좋은 무대장치였다. 거울이 많으면 활영세팅하기도 번거로웠울텐데... 흠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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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색,계>로 또다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한 리안 감독


  굳이 따지는 두 영화의 공통점: "마이클 클레이튼"은 조지 클루니가 다른 영화에서도 흔히 보던 방식으로 회사를 엿먹이고 난 후 택시를 타고 50달러어치 시내를 돌아달라고 하면서 끝이 나고 "색,계"도 마지막은 아니지만 거의 마지막 부분에 왕치아즈가 인력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두 장면 모두에서 배우들이 띄우던 묘한 표정은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