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시껄렁한 이야기/부귀영화

아는 여자

 처음 장진의 영화를 본 것은 "기막힌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남은 감상은 이 영화 굉장히 낯설면서 웃기는데...하는 것이었다.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처음 접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돼지가..."의 경우는 첫 느낌이 참 영화같지 않은 낯섦과 건조함이었고 "기막힌 사내들"은 톡톡 튄다하는 느낌에다가 감독이 참 재기발랄하리라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찍는다면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까 하는 흥미로움이 겹쳤고 나의 기우는 이내 "간첩 리철진"으로 해소되었으며 그 영화를 보며 나는 낄낄거렸다. 그 감독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킬러들의 수다"란 영화를 찍었으며 난 당시엔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물론 그 영화는 나름의 흥행을 했으며 명절에 공중파에서 방영을 해 주긴 했지만 난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때를 놓치면 참 보기가 힘들어진다) 아마 그 때쯤이었을게다. 장진 사단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던 것이 말이다.(이것은 전혀 그 시기에 대한 정확성이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니 신경쓰지 말 것)
  그렇게 진짜로 장진 사단을 꾸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묻지마 패밀리"를 내놨다. 물론 감독은 아니었지만 기획하고, 제작하고, 각본까지 했으니 그의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로베르트 로드리게스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참여했던 "포 룸"이 살짝 겹쳐보이기도 했던 "묻지마 패밀리"는 영화 내내 잔잔한 웃음을 던져주었으며 막판에는 큰 웃음을 주며 극장 전체를 뒤흔들었더랬다(비난을 섞어 말한다면 90여분 내내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 기다린 감도 없지 않을 것이다. 3편의 각기 다른 영화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내 나이키"의 감독이 후에 "웰컴 투 동막골"까지 찍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장진은 "아는 여자"를 내놨다. 영화를 보기 전 누가 찍었고 누가 나오는지 전혀 사전 지식이 없을 때 영화 초반에 나오는 <필름있수다 제작>이란 타이틀을 보곤 '아, 장진 사단꺼군'하는 예상만 했는데...
  장진이 연출한 영화의 여자배역 이름은 주로 "화이"였는데 "아는 여자"때부터 그 이름은 없어져 버렸고 새롭게 남자 배역 이름에 "동치성=정재영"이란 공식이 성립되었던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장진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멜로물이다. 그러나 멜로물이라고 통칭하기엔 약간은 부족하다. 코미디가 영화 전반을 뚫고 있으니 로맨틱 코미디라 하겠지만 장진이 좋아하는 스포츠인 야구를 버무린 스포츠-로맨틱 코미디이면서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린 슬픈-스포츠-로맨틱 코미디이면서 범죄도 나오니 슬픈-스포츠-로맨틱 코미디-범죄물이면서 영화 속에 영화가 있으며 그 영화는 판타지를 담고 있으니 슬픈- 액자 구성이 가미된 판타지-스포츠-로맨틱 코미디-범죄물..... 그래, 이 영화의 또 다른 목적은 장르의 주무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긴 요즘 누가 장르는 나누는 유치한 짓을 하겠는가. "장르, 그거 뭐 있겠습니까. 이런 장르, 저런 장르, 그냥 나누면 다 장르지요. 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암튼 그렇습니다. 어떤 장르냐? 남녀가 얽히냐? 그럼 애정물이고, 스포츠가 나오냐? 그럼 스포츠영화고, 웃기냐? 그러면 코미디물이고... 그런게 장르 아니겠습니까?" 

 영화 초반 첫사랑이 없고 주사가 없고 내년이 없다는 것에 상심한 동치성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할지 갈팡질팡한다. 영화 전반부를 관통하는 이 핸드헬드 기법은 잘 쓰면 사실감이 묻어나고 관객을 빠져들게 할지 모르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느닷없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가을길에서 여자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자 "누가 요즘에 고리땡을 입냐!"며 비통해하는 남자의 심정을 묘사하기엔 과잉이며 관객은 부담스러워한다. 게다가 끊임없이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 그냥 웃고 즐기자는 영화에서 난데없이 사랑에 대한 정의가 뭐냐고 다그치다니, 이건 어느 적정선에서 그쳐주길 바라는 관객의 기대에 배반하는 거다. 게다가 뮤직비디오 같기도 한 영화 속 영화는 또 어떤가. 남자와 여자가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다가 액션이 가미되고 그러다가 결국은 슬픈 결말에 도달하게 되는데 주인공은 전봇대라니.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영화가 다 있는가. 그러나 그것에 대한 비판은 모두 영화 밖 영화안의 관객인 동치성이 대신해 준다. 진짜 관객들은 단지 당연한 비판에 대해 그저 동의하고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동치성이 가한 비판은 모두 일련의 영화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동치성이, 혹은 정재영이 장진 감독의 매우 적절해 보이는 페르소나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장진 감독이 내뱉는 비판이며 스스로가 새로운 형식의ㅡ적어도 멜로물이란 장르내에서의ㅡ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 "아는 여자"일 수 있다. (((이 단락이 칭찬이냐고? 비난이냐고? 이상하다고 욕도 했다가 결국은 옹호하는 듯하지만 이 단락의 주제는 뜬금없게도 포스터 속에서 새침하게 나를 바라보는 이나영이었다....으응???)))

 TV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의 잔상이 아직 남아있을 때에  그리 다르지 않는 캐릭터로 동치성의 "아는 여자"로 분한 이나영의 연기는 꽤나 매력적이다. (뭐 외모도 거기에 일조하겠지만....) 하지만 영화의 맛을 살리는 것은 진짜 주인공인 정재영이다. 평소 성격인지 영화내에서 만들어낸 캐릭터인지 분간이 안 가게 만드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과연 천하일품이다. 무미건조한 그의 목소리톤은 진중하면서도 가볍다. "마라톤 5등 상품은 김치 냉장고다." 라고 읊조리는 그의 명대사는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지 않던가!!!

 "아는 여자"는 장진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구난방으로 늘어놓은 면이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산만하던 이야기들이 어느샌가 통일을 이루어 집중력을 되살려 놓는다. 감독은 어느 영화에선가 하고 싶었던 짧은 이야기들을 한 영화 안으로 몰아넣고도 큰 틀의 이야기 안에 녹아들게 만들었으며 "사랑하면 그냥 사랑아닙니까?"라며 사랑에 대한 열린 정의로 방점을 찍는 수완을 발휘한다.
 
케이블 채널에서 "아는 여자"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은 다름아닌 "장진은 천재다"라는 것이다.


◑약간의 사족을 달아본다. 영화에서 한이연이 궁금해하던 룰이다. 영화 마지막에 동치성은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땅볼을 잡아 관중석으로 던져버린다. 물론 그래선 안되지만.... 야구에서 수비가 땅볼을 잡아 1루에 던지지 않고 관중석으로 보내면 그라운드 룰 더블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심판이 고의적이라고 판단하면 그라운드 룰 트리플이 되거나 하겠지만 공이 손에서 미끄러졌다고 박박 우긴다면 그냥 그라운드 룰 더블이 될 가능성이 크다. 즉, 타자주자는 2루에 가게되고 만약 누상에 주자가 있었가면 모두 2개의 베이스를 가게 된다.
 수 년전에 마지막 카운트를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으로 타자를 잡고 포수가 타자를 태그하지도, 1루에 던져 포스아웃도 잡지 않고 그냥 관중석으로 던져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때도 그라운드 룰 더블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 팀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역전을 당했고 경기에 졌다..... 그렇게 진 팀은 삼성 라이온스였는데 그 실수를 저지른 포수는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현재윤이었나???....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