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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껄렁한 이야기/부귀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The Lives of Others)


난 아직도 독일영화는 표현주의나 뉴 저먼 시네마라는 영화사조에 따른 작품들만 있는 줄로 알고 있으며 매우 난해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영화는 누벨바그 내지는 누벨 이마쥬, 이탈리아 영화는 네오 리얼리즘만 있다는 선입견이 뿌리 깊숙히 자리하고 있기에 매우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마음을 갖고 영화를 본다.

덕분에 이런 영화들을 보면 잠이 솔~솔~~ 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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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독일영화를, 그리고 평단의 찬사를 받은 "타인의 삶"을 봤다. 이 영화가 어떤 영화사조에 속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하긴 요즘 뭐 어떤 영화가 어떤 영화사조인가가 그리 중요한가.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나 파리 텍사스를 보고,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보면서 아, 이런 영화가 뉴 저먼 시네마로구나를 느꼈다면 나는 펠리니나 로셀리니의 영화를 보면서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네오 리얼리즘이라 해도 나에겐 모두가 그냥 졸리는 영화니까... (웃자고 하는 소리다.....만 솔직한 심정이다ㅠㅠ)

아무튼 이 "타인의 삶"은 동독을 소재로 한 ─한국에서 접하기엔─드문 영화다. 일전에 "굿바이 레닌"을 아무 생각없이 본 기억이 있기에 뭐 별반 다르랴하고 봤지만 굿바이 레닌보다는 많은 여운이 남는 영화다.

이미 영화를 보고 그 영화가 나중에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 그래, 그럴만 하다든지, 아니면 뭐, 그런 영화를.... 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 어느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만 하면 왜 이리도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는지, 원... 이런게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에 해당하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포스터에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란 문구가 가득한 영화들을 보면 '그래,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보자'하는 도전하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보게 된다. 소심한 권위에의 도전이랄까.

각설하고,


그리고 마침내 문화부 장관의 속내가, 비즐러가 그토록 열망하던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CMS를 가로채기 위한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지한 비즐러는 감시명령을 내린 자와 감시당하는 자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인다. 드라이만이 자신이 존경하던 선생이 죽자 동독의 실태를 슈피겔紙에 알리려는 것을 알고도 비즐러는 숨겨주며 나중에는 결정적 단서인 타자기를 빼돌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드라이만은 알지 못한다.  결국 비즐러는 편지를 검열하는 부서로 좌천되고 드라이만에 내려졌던 감시망도 풀리게 된다.

1989년 마침내 장벽은 무너지게 되었지만 독소권력의 중심에 있던 문화부 장관은 여전히 권력자가 되어있으며 드라이만은 그에게서 자신도 예외없이 감시대상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던 자가 HGW XX/7이란 암호명을 가진 비즐러란 사람임을 알게 되고 그를 먼 발치에서 보게 된다.

다시 몇 년 후, 드라이만은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란 책을 내게 되고 비즐러는 그 책의 첫 장에 기록된 "HGW XX/7에게 헌정합니다"란 문구를 보게 된다.....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영화에서 비즐러가 변화하게 된 원인이나 사건이 "아" 하고 탄성을 자아낼 만큼 크고 강력하게 감지할 만한 대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국가에 대한 정치적 충성도가 강하고 확신에 차 있던 비즐러가 예술가들의 대화나 음악, 문학 등 예술의 힘에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지게 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명분도 그리 없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영화가 흘러가면서 '어, 왜 저래?' 라고 조금씩 눈치챌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두 시간여 동안의 불편함은 마지막 5분여의 깔끔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클로징이 덮어준다. 예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가 두 시간 동안 좋았다가 마지막 5분여 때문에 조금 실망스러웠다면 이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은 마지막 5분여 덕분에 더 좋아진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이런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이야기가 먼 나라 혹은 아득히도 먼 옛날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도 수 십년 전에는 ─다까키 마사오 혹은 오카모토 미노루, 그리고 a.k.a─박정희가 독재권력을 휘둘렀을 때도 분명히 있던 이야기다. "타인의 삶"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영화 속 이야기로만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브레히트의 또 다른 유명한 시가 생각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오늘은 5월 18일이고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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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이 수많은 상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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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즐러 혹은 HGW XX/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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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오르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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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장면에서도 비즐러는 자신의 삶에 대해 반추해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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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가끔 어떤 배우들이 "연기를 왜 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매력적이라서"라는 류의 (다소 정형화된) 대답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서의 살미라는 어떤 고민이라든지 내적 갈등의 표면화를 이뤄내줘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실망스럽고도 안타까운 적이 있다. 그냥 솔직히 돈을 벌고 싶어서라든가 잘 생겨서, 예뻐서 미용실 원장님이 추천해줘서라는 대답을 듣기란 그리도 어렵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