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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껄렁한 이야기/끄적끄적 긁적긁적

능양시집서 中에서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인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고 보니 괴이한 것도 많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통달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 앞에 열 가지가 떠오르고, 열 가지를 보면 마음에서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이 도로 사물에 부쳐져서 자기와는 상관함이 없다.

때문에 마음은 한가로워 여유가 있고 응수함이 다함이 없다.

그러나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다가 홀연 유금(乳金)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錄)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아!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둔 것도 충분한데, 다시금 까마귀를 가지고서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色] 가운데 깃든 빛[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態)가 없는 것은 없다.


연암 박지원, '능양시집서 菱洋詩集序'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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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없어지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현상을 보고도 그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아니 적확히 말하면 없어진다.

나이는 먹어가는 데 나는 이제 성장이 멈춰진 것은 아닌가 싶다. 예전엔 좌절하고 땅을 파듯 내 삶을 꾸려나가는 와중에 어느 날 조금씩 나의 성장을 눈치챌 수 있었는데...

여의치가 않다. 쿨럭...


헉헉헉...

새벽은 가까워 오고 있다.